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드골 (문단 편집) == 일화 == 키가 매우 커서 '''196cm'''나 되었으며[* 위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인 [[존 F. 케네디]](185cm), [[콘라트 아데나워]](187cm)를 압도한다. 실제로 드골 본인부터가 네덜란드계 혈통이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de_Gaulle|#]]] 덕분에 [[루저의 난]] 당시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공헌[* 연합국 지도자들의 평균 키가 딱 180cm인데 드골이 196cm이니 위너가 되게 만들었다는 개드립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5cm으로 한 기럭지 했었지만 휠체어를 탔고,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168cm, [[장제스]]가 169cm다. 추축국 지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175cm,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가 169cm, [[히로히토]]가 165cm였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 최단신인 [[나폴레옹 3세]](160cm)보다 '''36cm''' 더 크다. 유난히 장신이 많은 게 특징인 미국 대통령들중에서도 샤를 드골보다 컸던 사람은 없다. 다만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식 신장은 193cm이지만 197cm였다는 말도 있다.][* 다만 추축국 지도자들도 당대 기준으로는 평균 이상이었다. [[1895년]]생 기준, 독일 남성의 평균키는 171cm, 이탈리아 남성의 평균키는 167cm, 일본 남성의 평균키는 159cm였다.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의 [[장제스]] 또한 당대 중국 남성의 평균키(160cm)보다는 10cm 가까이 컸다.]을 한 지도자라는 농담이 나돈 [[https://m.dcinside.com/board/worldwar2/56390|2차 대전 갤러리 "핼구"의 작품]] 여기에 더해서 [[윈스턴 처칠]]에게 가려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루 두 갑을 태우는 애연가였다고 한다. 다만 1950년에 금연을 선언했는데 금단 증상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고.. '프랑스인 치고는' 지독할 정도로 시간 관념에 철저해서 식사 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조차도 원칙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집에서도 침실 밖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정장을 입었으며 식사 시간에는 정치 등의 공적인 이야기를 금지했다고 한다. 술은 잘 못했지만 식욕은 왕성해서 대식가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노년에 [[당뇨]]로 식단 조절을 할 때 왕성한 식욕을 조절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의 투사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할 수 있는 말은 독단성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주위에 많은 반감을 샀지만 프랑스의 독자적 정부수립과 독자적인 대외노선을 관철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고, 가끔은 이러한 독단성이 하나의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칠은 그의 영국에 대한 불신과 독단성에 대해 넌더리를 내며 그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 독단성에서 나오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대담함에 경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지지했다.[* 전후에도 처칠에 대한 드골의 마치 나쁜 남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는 어디 간 게 아니라서 전쟁 후 드골이 가장 먼저한 행동은 처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지만, 드골과의 만남에 대한 "나는 강인하고 무표정하게 서있는 드골을 보았다. 그와 인사를 나누며 나는 불어로 속삭였다. L'homme de destin!(운명의 사람)"이라는 처칠의 오버섞인 기록에 대해 드골은 "그런 적 없다"라고 심드렁하게 까버린 적도 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정치인의 수사 아닌가 하지만, 2차대전 당시에 둘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기만 하면 프랑스어나 영어로 고성에 막말을 하며 개와 고양이처럼 싸웠고, 처칠의 경호원들은 처칠이 드골의 총에 맞아 죽는 게 아닌가 걱정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둘의 대립은 전후 프랑스의 권력구도에서 드골을 떼어내기 위해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점점 심각해진다. 드골에 대해 혐오를 느끼던 처칠은 드골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영국 내각에서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영향력을 갖추어가던 드골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 둘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했던 영국 내각의 회고들이 골 때린다. "모두들 수상이 없는 자리에서는 매우 용감하게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앤서니 이든]]),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드골을 헐뜯는 수상의 열변을 들어야 했다, 루스벨트와 수상, 그리고 솔직히 말해 드골까지도 사춘기 소년들마냥 행동한다. 이럴 땐 어쩔 도리가 없다.", "이로써 모든 계획은 망했다. 우리는 항상 잘못된 곳으로 발을 들여놓고 그 때 드골이 나타나 더 잘못된 쪽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그는 이성을 잃었다."(알렉산더 캐도건)] 자칫 잘못하면 연합군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었던 삼각관계는 드골의 승리로 끝을 맺었지만 그도 당시의 고난을 잊지 못했는지 D-day 전날 처칠이 했던 말[* 유럽과 대양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늘 대양을 선택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당신과 루스벨트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처칠의 말에 드골은 프랑스와 미국 간의 불화가 있을 경우 영국이 미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알겠다고 답했다고 한다.]을 두고두고 회고하곤 했다고 한다. 전후에도 처칠에 대해 이런 뒷담화를 까는 것과 동시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의 장례에도 그들이 함께했던 때처럼 군복 차림[* 처칠은 1939년 4월 4일 왕립 공군의 명예 준장 계급을 받았으며 드골은 1940년 5월 23일 임시로, 6월 1일 정식으로 장성 계급에 진출하였다. 모로코 [[마라케시]]에 위치한 자유 프랑스 병영 시찰이나 1944년 11월 11일 파리 샹젤리제 가두 행진 등 수많은 자리에서 그들은 준장 군복 차림으로 동행했다.]으로 마지막 길을 지켰던 걸 보면 드골에게 있어서 처칠은 말 그대로 애증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참고로, 영국의 이런 확고한 대서양주의를 본 드골은 서독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연합의 전신인 EEC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꽤 흥해 영국이 가입의사를 밝히자 드골은 '''두 번이나 거부권을 써가며 반대했다.''' 이를 영국인들은 세계대전 때 드골을 도와줬던 걸 내세우며 통수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 다만, 드골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처칠에게 직접 언질을 들은 것처럼 영국의 뿌리깊은 대서양주의를 알았고 특히나 미국이랑 영국이 긴밀한 관계인 것을 떠올리며 '''영국은 서독이나 프랑스에 비해 유럽에 딱히 헌신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는다. 지금에 와서는 그의 영국에 대한 평가가 [[브렉시트|정확했다]]고 재평가 받고 있는 중. [[http://blogs.usyd.edu.au/theoryandpractice/_Anne_de_Gaulle.jpg|다운 증후군 환자인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대체로 가족들도 상대하기 힘든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가족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편지를 굉장히 자주 보내곤 했으며 편지 속의 문장은 평소의 드골의 이미지와 다르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라고... [[다운 증후군]] 환자로 태어난 둘째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 부분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피소드/2017년#s-47|2017년 11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아끼던 후배 장교가 병으로 일찍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6개월간 상복을 입고 다닌 것도 유명한 일화. 프랑스 정치인들은 19세기부터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사생활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드골은 예외적으로 자기 와이프에 충실했으며, 매우 가정적인 남자였다. 사생아는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애인 한 명 두지 않았으니... [[프랑스]] 정치인들의 사생활은 가히 화려한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부터 현 [[에마뉘엘 마크롱]]까지 모든 대통령들은 꼭 성 스캔들이 있었으며 드골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생아까지 낳았다. 과연 드골이 특이할 수밖에 없다. 역대 프랑스 공화정의 지도자 중에서도 드골보다 사생활이 더 검소한 사람은 이 부분에서 끝판대장급으로 청렴했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정도뿐이다. [[파일:external/www.charles-de-gaulle.org/philippe_DG.jpg]] 2차대전 중 아들(左)과 함께. 아들 [[필리프 드골]] [[제독]](1921 ~ )은 [[프랑스 해군|해군]] 장교로 입대해 2차대전 중엔 아버지를 따라 자유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 해방 이후에도 복무하다가 해군 감찰감(Inspecteur général de la marine) 보직을 마지막으로 해군 [[대장(계급)|대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별세한 이후에도 현역 군인으로 지냈다(1982년 예편).] 그후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가 은퇴하였다. 현재(2022년) 나이 '''101세'''다. 위 사진에 나온 사람.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 없는지 이 사람도 아버지와 같은 '''196cm'''의 장신이다. 필리프 드골은 슬하 4남을 두었다. 사임 후 시골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이 때가 드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불평을 한 때였다고. 마지막으로 한 말도 ([[목]]을 가리키며) '여기가 아프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고 몇 분 후에 숨졌다. 드골이 사망하자 영국의 극작가 노엘 카워드 경은 "드골이 하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야 하느님의 [[프랑스어]] 실력에 달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는 드골의 고집에 대한 비아냥인데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으므로, 조물주와의 면담에서도 그 고집을 부릴 거라는 소리.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히틀러와 혼동되기도 한다. 물론 문제는 그 콧수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영 인디아나 존스]]에서 1차 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 인디와 만나는 걸로 설정된다. 역시 몇번 탈출하다 잡히고 마지막 순간에 국경 지대에서 인디와 헤어져서 생포되는 것으로 처리했다. 극에서는 이렇게 끝나지만 원래 시놉시스에 따르면 인디는 흘러 흘러 베를린으로 가서 1차 대전의 주역을 만난다는 설정이었다. 히치콕 감독의 동일명 영화의 원작인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약간 치매끼가 있고 극도의 미국비판론자로서 결국 소련의 첩보조직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는 프랑스 대통령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미국 및 나토에게 악몽과 같던 프랑스의 나토 탈퇴도 이 첩보조직의 공작행위의 결과라고. 물론 이름은 다르지만 작중 묘사되는 북아프리카의 행각이나 알제리 사건 등에 대한 묘사, 결정적으로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출신', '반미 민족주의자 정치인'이란 표현을 보면 드골이 맞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키를 더욱 과장해서 아예 얼굴이 나오지 않는 캐릭터로 나온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땡땡주의자]]이기도 하다. "나의 유일한 라이벌은 땡땡이다. 그는 거인에 맞서는 소인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라는 연설을 대통령 취임식 때 대놓고 한 것으로 유명. 입냄새가 무척 심각해서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대화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2차대전 종전 후 제5공화정을 수립하기 전까지 정계에서 은퇴해서 칩거생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통에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 외의 재산도 마땅치 않은 데다 수입이라곤 준장 계급의 연금뿐이었기 때문. 그런데, 프랑스 의회에서 드골의 계급을 진급시키는 안건을 발의하자 정작 드골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진급을 한다면 연금 또한 인상되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겠지만, 전쟁도 끝났는데 이제 와서 진급한다는 건 자신의 품위를 해칠 수 있다는 게 드골의 주장이었다.[* 아들인 필리프 드골의 회고에 의하면, 샤를 드골은 옛날부터 돈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일화중 하나로 어렸을 때 식사중에 아버지보고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밥먹는데 그런거 이야기하는거 아니라고 야단 맞았다고...] 그래서 드골의 공식 계급은 준장으로 고정되어 있다. 드골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머니와 영원히 이별해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인 잔 마리 드골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병으로 건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으나, 드골 혼자서도 망명하기 힘든 판에 환자인 어머니까지 모시고 가기엔 무리였다. 결국 드골은 망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난 뒤 혼자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는 드골이 망명한 직후인 1940년 7월 16일에 사망했고, 드골은 임종은커녕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형제자매들 중에서 막내 동생인 피에르 드골과 가장 사이가 좋았는데 피에르가 샤를 드골과 외모가 너무 닮아서 대통령 경호원들이 피에르 드골을 샤를 드골로 착각해서 그에게 종종 실수로 경례를 한적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